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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勢法考*   이종림(대한검도회 부회장)
국문초록
본 연구는 본국검법과 함께 무예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검법인 '朝鮮勢法'에 관한 것으로 특히 중국의 병법집대성적
문헌인 <<武備志>>를 통해 17세기초에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검법이며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되는 그 바탕을 밝혀보려는 시도이다.
먼저 우리 검 문화의 대략을 점검하였고 한?중 양국의 兵書와 武藝書를 대조 검토하였으며, 조선세법 이전의 劍法
이나 擊棒 등의 무예를 一瞥하면서 연관관계나 역사적 배경 등을 알아보고 조선세법의 실기를 법에 따라 재현하였다.
연구의 결과 조선세법은 동양삼국의 검법에 영향을 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국제적 교류의 뿌리가 되었으며 이는
무도사에 획기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다. 또한 조선세법의 실기를 통하여 우리의 것이 국제검도계에서 뚜렷한 존재로
부각될 것이며 우리 검도의 역사에도 한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

I. 서 론
역사가 있는 민족 중에 칼(劍,刀)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그러나 스스로 오천년의 역사를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우 리의 문화 속에 언 제부터인가 확연치는 않으나 칼은 예외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리고 막연히 '칼'이라면 일본 것이 라고 치부해 온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중국의 고서인 <<山海經>>에는 朝鮮, 肅愼之國 (息愼,稷愼), 大人國, 君子國, 靑丘國, 貊國, 蓋國 등 으로 그들이 말하는 소위 東夷의 나라 이름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으며 제9권 海外東經에는 군자국을 < 설명하는 대목에 "군 자국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 양보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다."¹)라고 했다.

또한 제17권 大荒北經에는 蚩尤氏가 병장기를 만 들어 黃帝를 정벌하였다고 하였으며 懿行의 案에 는 管子의 地數篇을 인용하여 "蚩尤氏가 葛盧山의 쇠를 캐서 劍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²) 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정사인 <<史記>>에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데 應 는 "蚩尤氏가 옛날의 천자이며 五兵의 무기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孔安國은 "蚩尤氏란 九黎君의 號"라 하였다.

* 이 논문은 사단법인 대한검도회 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¹)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 好讓不爭
²)蚩尤作兵伐黃帝(懿行案......管子地數篇云蚩尤 受葛盧山之金而作劍鎧矛戟)

<<史記>> 제40권 楚世家第十에는 "紂가 黎山에 서 회맹을 가졌는데 東夷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服虔이 말하기를 "黎는 東夷의 나라 이름이다.³)라고 하여 九黎나 東夷 혹은 九夷가 모두 고대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일반적 인 고유명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이로 미루어 우리 는 옛날부터 중국보다 앞선 훌륭한 칼의 문화가 있 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기록들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해 고고학적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는 사실로 증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 중 安岳제3호분은 4세기 중엽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大行列圖는 높이가 2m,
길이가 10m에 이르는 장엄한 것으로 왕의 행차에 따르는 250여명의 악대, 의장대, 무사와 고관들을 그려
놓았는데 특이한 것은 어가 전대에 중 앙좌우로 칼춤을 추는 무사가 각 1명씩 있는 것이다. 칼은 환두대도로
길이는 약 1m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藥水里고분의 벽화는 5세기초의 것으로 여기에도 건장한 무사가 환두대
도를 오른손에 들고 劍舞나 劍法으로 보이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된 고구려문화전도록에 따르면
이 벽화가 守衛圖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여하튼 고분벽화에까지 등장하는 행위의 실체 로 보아
고구려 칼의 문화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989년 2월 부산에서 발견된 <花郞世紀>

필 사본에는 신라의 斯多含,文弩 등 花郞, 風月主의 擊 劍사실이 비교적 체계 있게 기록되어 있으며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金庾信과 칼에 대한 신위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劍法의 실체에관한 기록은 >당시의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武學齋가
있었고 무신집권시에는 五兵과 手搏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朝鮮 초기에도 궁중에서 木劒, 竹棒 등으로
三甲戰法을 행한 기록 으로 보아 전래된 검법 등의 武藝가 맥을 이어 내 려 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임진왜란
이 발발할 당 시에는 오직 弓矢만이 명맥을 보존하고 있었을 뿐 우리의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히려 중국에서 五 兵의 기예를 빌어 배울 지경에 이른 것이다.

英ㆍ正祖 때에는 무예의 기풍이 진작되어 武藝 에 관한 서적이 왕명으로 편찬되기도 하였으나 끝 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채 칼의 문화도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근래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찾으려는 기운이 일 어나 체육학계에서도 전통무예를 연구하려는 바람 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무예란 실기가 근본이므로 사적 고찰이나 서지학적 접근 방법만으 로는 학문적 성과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근자에 근본도 근거도 없는 무술이 전통 무예로 행세하는 처사를 방관할 수만도 없는 것이 우리 학계의
또 다른 과제이며 학문적 부담이기도 한 것이다. 본 논문은 본국검법과 함께 현존하는 세계 最古 의 검법인
朝鮮勢法(문헌적 실기로는 본국검법보다 약 170년이 앞선 것이다)의 사적 고찰과 전통검법 의 실체를 밝히려
는 노력의 일환이다. 연구자는 1965년<무예도보통지>를 처음 접 한 이래 1976년<대한검도회보&>
제2호에 본국 검법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1984년에는 학위논 문으로 이를 보충하였으며, 1982년 U.C.
Berkeley에 서 조선세법(무비지의 교예편)을 얻어 <무예도보 통지>의 예도 등과 함께 비교 연구하여 왔으며
이제 그 대략을 밝혀보고자 한다.

³) 紂爲黎山之會東夷叛之(集解)服虔曰黎東夷國名 子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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